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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자연

보은 속리산 법주사

( 2019. 7. 12 )

보은 속리산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를 참으로 오랜만에 찾았다. 20십 년이 넘었다.

단풍이 절정이던 지난 해 가을에 찾았다가 갑자기 천둥과 함께 내리는 비 때문에 조각공원에서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날씨는 좋지 않았다. 가끔씩 빗방울도 떨어지고 햇빛이 없어 셔터 타임 확보가 어려웠다.

단풍이 좋은 돌아오는 가을에 꼭 다시 찾으리라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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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품송 (正二品松)

높이 약 15m. 수령은 500∼600년. 천연기념물 제103호 

조선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소나무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 걸린다”라고 외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 하여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이품송을 지나 바로 위에 넓은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소나무 아래에 작은 돌로 표시를 해 놓은 것이 먼 옛날 통행하던 길이란다.

왼편으로 소나무 가지가 너무 없어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1982년부터 솔잎혹파리의 피해를 막고자 10여 년 동안 대형 방충망으로 보호조치를 하여

오랫동안 제대로 볼 수가 없던 때도 있었다. 

관광객이 붐비지 않을 때는 속리산 레이크힐스 관광호텔이나 덕림산채식당을 목표지로 정하여

소형차 주차장에 주차하면 되지만 웬만하면 만차로 먼 거리의 주차장에 주차를 해야 한다.

여름철 금요일 오후라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소형차 주차료 4,000원

소형차 주차장으로부터 레이크힐스관광호텔 앞을 지나 매표소까지는 대략 500m의 거리다.

법주사에는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 유형문화재가 22점이나 있다.

문화재 관람료는 무려 4,000원이나 한다.

청양 칠갑산 장곡사는 국보 2점, 보물 4점이지만 문화재관람료가 없다.

오리숲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가을 단풍철, 빛 들은 오리숲을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매표소로부터 다시 500m쯤 걷다 보면 호서제일가람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난다.

법주사 금강문 (法住寺金剛門)

일주문을 지나 300여 미터 더 올라가면 수정교를 건너 금강문에 다다른다.

금강문 좌우로 낮은 돌담이 둘러져 있다. 금강문 왼쪽에 있는 담장과 공중전화부스

기와 담장과 빨강의 공중전화부스의 어울림... 무언가 느낌이 있다.

금강문 오른쪽으로 드리워진 담장 역시 운치가 느껴진다.

저 담장을 돌아 들어가면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가 나타난다.

금강문 내부에는  좌우로 석가모니불의 협시불(脇侍佛)인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그리고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상 2위가 모셔져 있다. 

아래는 부처의 중생제도를 돕고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다는 코끼리 등에 올라 탄 보현보살 

부처의 왼편에 위치하는 협시불(脇侍佛)로 사자를 올라탄 문수보살

렌즈 마운트가 귀찮아 70-200으로 그대로 담다보니 너무 크게 잡혔다.

법주사 당간지주 (法住寺幢竿支柱)

금강문을 통과하면 왼쪽으로 법주사 당간 지주와 석련지(石蓮池)가 나타난다.

당간지주(幢竿支柱)란 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깃대(당간)와 버팀돌(지주)을 말하는데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 있다.  고려 초(1006년)에 16m 높이로 조성되었으나

조선말 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다는 명목으로 사찰의 금속물을 징발하면서

사라졌던 것을 1910년에 22m의 높이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법주사 석련지 (法住寺石蓮池) 국보 64호

8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높이 1.95m, 둘레 6.65m.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예전에는 물을  담아 연꽃을 띄웠다고 한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당간지주, 석련지, 천왕문, 목조 오층탑인 팔상전

법주사 철확(法住寺鐵鑊), 쇠솥 보물 1413호

720년, 신라 성덕왕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쌀 40 가마를 담을 수 있는 크기란다.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밥솥 또는 장국을 끓이는 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

금동미륵대불 (金銅彌勒大佛)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으로 신라 36대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하여 1000여 년간 전해오다

조선 대원군에 의하여 「당백전」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철(毁撤)

그 후 1939년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만들어진 시멘트 불상이 약 50여 년간 있어오다가

1987년 해체되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에 이르렀으며

현재의 대불은 2000년부터 개금불사 공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완공

총 80㎏의 순금이 소요됐으며 표면에 0.003㎜ 두께의 금막을 특수 도금하였고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팔상전 (捌相殿) 국보 55호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며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모신 사찰 전각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고, 팔상전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선조 38년(1605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복원한 것으로,

1968년의 해체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법주사 쌍사자석등 (法住寺雙獅子石燈) 국보 5호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8각석등. 높이는 3.3m 대웅전과 대웅보전 사이에 위치

법주사 대웅보전 (法住寺大雄寶殿) 보물 915호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음

삼신불(三身佛) :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 석가모니불

대웅전 정면으로 보물 15호인 사천왕석등이 있고 좌우로는 아름드리 염주나무가 위치해 있다.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종인 열매로 염주를 만는다는 염주나무가 많이 있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法住寺磨崖如來倚像) 보물 216호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또는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의상(倚像)은 의좌상(倚坐像)의 다른 말 (倚 의지할 의. 의지하다, 기대다)

그러니까 무엇엔가 의지해 앉아 있다는 의미로 연꽃 위에 걸터앉아있어 의상(倚像)인 것이다.

왼쪽의 거대한 바위가 수정봉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추래암(墜來巖)

피안을 찾아가는 길 - 수정암 (水晶庵) 가는 길

저 문을 들어서자마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바위 추래암 아래를 몇 십미터 지나

다시 거대한 바위가 좌우로 문을 만들고 있다.

이해를 돕기위해 아래의 수정암에서 나올 때의 사진으로 설명을 해본다.

사진의 앞에 좌우로 이끼 낀 거대한 바위가 대문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데

저 바위가 수정암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 곳이 곧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넘나드는 지경(地境)인듯 싶었다.

금강문이 아닌 금강문 왼쪽 담장을 따라 난 조그만 문으로 들어서면 수정암(水晶庵)으로 가는 길이다.

마침 스님 한 분을 따라 들어가며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저 스님께서는 나오실 때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였기에 들어갈 때는 마음 놓고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저 돌기둥 문을 통과하면 무릉도원이며 피안이 있지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수정암 안마당에도 커다란 염주나무가 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염주나무가 법주사에는 참 많았다.

오늘 비로소 염주나무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산종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템플스테이 건물

 

템플스테이 건물 담장

 

 

 

속리산 연꽃단지에서...